김근태 고문 사건
 
소위 \"깃발사건\"으로 김근태의원이 85년도에 고문을 당한 내용입니다. 

아래글은 85년 12월19일 법정에서 김근태의원의 증언입니다. 

\" 본인은 9월 한 달 동안, 9월 4일부터 9월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습니다.

전기고문을 주로 하고 
물고문은 전기고문으로 발생하는 쇼크를 완화하기위해 가했습니다. 
고문을 하는 동안 비명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위해 
라디오를 크게 틀었습니다.
그리고 비명때문에 목이 부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되면 
즉각 약을 투여하여 목을 트이게 하였습니다. 
(어지러운듯 말을 중단하고 난간을 붙들면서 잠깐 쉬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9월4일 각 5시간씩 두차례 물고문을 당했고,9월5일,9월 6일 
각 한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습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했고. 
10일 한차례,13일.......... 13일의 금요일입니다. 
9월 13일 고문자들은 본인에게 
\"최후의 만찬이다.\"\"예수가 죽었던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날이다.\" 이러한 협박을 가하면서 두차례의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다음에 20일날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차례받았습니다. 
그리고 25일날 집단적인 촉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차례 구타를 당했습니다. 
물론 잠을 못잔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것도 대략 절반쯤됩니다. 
고문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까지 밥을 먹지못합니다. 

가방을 갖고 다니면서 그 가방에 고문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장한 사내는 
본인에게 
\"장의사 사업이 이제야 제철을 만났다. 
이재문(남민전 사건의 주범,옥사했음)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속으로 부서져서 병사를 했다. 
너도 각오해라. 지금은 네가 당하고 
민주화가 되면 내가 그 고문대 위에 서줄테니까 
그때 너가 복수를 해라\" 

이러한 참혹한 이야기를 하며 본인에 대한 동물적인 능욕을 가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본인은 알몸이 되고 
알몸상태로 고문대 위에 묶여졌습니다.

추위와 신체적으로 위축돼 있는 상태에서 본인에 대해 
성적인 모욕까지 가했습니다. 
말씀드리면 제 생식기를 가리키면서 

\"이것도 좆이라고 달고다녀? 민주화 운동 하는놈들은 다 이따위야!\" 

이렇게, 말하자면 깔아뭉개고 용납할수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고문을 할때는 온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눕히면서 몸을 다섯군데를 묶었습니다.
발목과 무르팍과 허벅지와 배와 가슴을 완전히 동여매고 그 밑에 담요를 깝니다. 
머리와 가슴,사타구니에는 전기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 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하면서 
전기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와 
(이때 방청석에서 울음이 터지기 시작, 본인도 울먹이며 진술함) 

이때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고 심지어 교도관들조차 숙연해짐)
는 노래를 뇌까리면서 과연 이것을 지켜내기 위한 인간적인 결단이 
얼마나 어려운것인가를 절감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때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연상했으며 
이러한 비인간적인 상황에 대한 인간적인 절망에 몸서리쳤습니다. 

(방청석 통곡) 

그들은 고문을 하면서 
\"시집간 딸이 잘 사는지 모르겠다.\" 

\"아들놈이 체력장을 잘 치뤘는지 모르겠다.\"는 등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애정어린 말들을 주고 받았으며 본인에게도 이야기 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고문과 폭력적 행위를 자행하는 자들이 
개인의 가족들에게는 인간적인 사랑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렇게 양면성이 공존할 수도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이 다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고문을 전담하던 자 중의 한사람은 -이름을 밝히진 않겠지만- 
나중에 혼자서 제 손을 잡고 이야기하기를

\"고문하는것을보고 구역질이 났다. 여기서 빨리나가라. 
허위로라도 다 인정해라. 여기있으면 당신은 죽는다\"고 울면서 얘기했습니다. 

결국 9월20일이 되어서는 도저히 버텨내지 못하게 만신창이가 되었고 
9월 25일에는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날 그들은 집단폭행을 가한 후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할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현대사 산책 - 강준만(인물과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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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아래 콘텐츠는 모두 KBS 기자협회 콘텐츠임을 밝힙니다.
이 콘텐츠를 제작한 KBS 기자들은
이 일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정권에 완전히 장악된 KBS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하고 있는
KBS의 방송 '텔레반'들을 응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인규 씨는 도둑 취임식에서 ‘정치 권력으로부터 KBS의 독립을 지키러 왔다‘고 공언했습니다. 비록 잠시 정치활동을 했지만 자신은 정치인이 아니라 언론인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럴 것이라고 믿는 일부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MB 특보를 한 것만으로도 분명한 결격이 되겠지만 한번 검증을 해 봅시다.

김인규 씨는 기자였고 본인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김인규 씨는 KBS에서 정치부 통으로 성장했습니다. 이후 정치부장과 보도국장, 센터장, 이사로 승승장구했습니다. 지금부터 오늘의 김인규를 만든 당시 김인규 기자의 활약상을 보시겠습니다. 이 분이 KBS의 정치적 독립을 지킬 수 있을지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면교사로 기자로서 방송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1> 1987년 1월15일 민정당 창당 기념식


87년 1월 14일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벌어진 날이다. 새해 벽두부터 수많은 양심인사들이 각종 이적단체 혐의로 구속되고 시국 사건도 끊이지 않고 있었다.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은 정권연장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있었다. 이 와중에 1월 15일 민정당은 창당 기념식을 열었고 당시 민정당 출입기자였던 김인규 씨는 이를 보도했다.

리포트:

지난 6년 전 극심한 사회혼란과 정치적 위기라는 시대적 상황속에서 출번한 민주정의당은 무엇보다 구정치질서의 청산과 개혁을 위해 새시대 새정치의 기치를 내걸고 새역사 창조에 나섰습니다. 민정당은 창당 때부터 희생과 봉사의 정신으로 당원들이 당비에 의해 당을 운영해 나가는 자립정당상을 우리나라 정당사상 처음으로 확립하고 구시대적 정치 병폐의 재현을 막기 위한 청렴정치에 앞장서 왔습니다. 특히 국민속의 정당을 목표로 민생 문제와 관련한 참신한 정책 개발에 주력해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와 국민연금제도 최저임금제 도입, 그리고 농어촌 종합대책 등 실제 국민 복지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서 정책 정당으로서의 면모를 굳히고 있습니다. 특히 민정당은 선진조국 창조에는 다른 분야에 비해 뒤져 있는 정치 선진화가 필수적이라는 인식아래 헌법 개정문제가 제기되자 날로 변화하는 사회 추세에 부응해서 권력의 분산과 국민의 정치 참여라는 두가지 측면에 역점을 둔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마련함으로써 이를 관철시켜야 하는 개헌 정국을 맞았습니다. 그동안 세차례 선거를 통해 집권당의 위치를 다져온 민정당은 이제 88년에 평화적 정부이양과 서울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대업을 차질없이 수행하기 위해 합의 개헌을 통한 의원내각제 관철과 제13대 총선에서의 압승을 통한 정권재창출이라는 시대적 사명에 직면한 것입니다.



2> 1987년 4월13일 전두환 “호헌 선언”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일부 폭로되면서 민주화 열기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4월 13일 전두환은 “개헌 논의를 유보하고 현행 헌법으로 정부 이양을 한다”는 내용의 ‘4.13 특별 선언’ 발표했다. 김인규 기자의 보도를 보자.


리포트:

전두환 대통령이 오늘 특별 담화를 통해 임기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른 정부 이양과 국력 소모적인 개헌 논의의 지양을 선언한 것은 오늘의 난국을 타개하고 내년의 양대 국가 대사를 차질없이 차질없이 치르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헌법문제와 관련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명백히 제시한 것입니다. 현시점에서 헌법 문제와 관련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합의 개헌을 추구하면서 무작정 기다리던가 아니면 다수의 힘을 배경으로 일부 정치세력과의 합의만으로 개헌을 강행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것도 현실 여건을 감안할 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이상 일단 국력소모적인 개헌논의를 지양하고 현행헌법에 따라서 안정속에 국가 대사를 실천해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최근 야당의 내분과 갈등으로 대화와 타협에 의한 합의 개헌 기대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대로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은 오히려 시간 낭비이며 책임 회피일 뿐 아니라 앞으로 열달 정도밖에 남지 않은 우리 헌정사의 최초이자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을 여는 평화적 정부 이양에까지 차질을 빚을 것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헌논의 출발의 당초 목적과는 달리 혼미한 현 정국의 원인이 되고 평화적 정부 이양에 장애가 되고 있는 국론 분열적이고 정쟁적인 개헌 논의 자체를 일단 뒤로 미뤄 정치적 파국을 막는 동시에 내년에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른 뒤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보다 나은 방향으로 헌법문제의 원만한 합의점을 찾는 것이 국가 100년 대계를 위해 최선의 길이라는 통치적 차원의 결단이 내려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1987년 6월3일 노태우, 대통령 후보 제청

군부 독재 정권은 직선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적인 요구를 희석시키기 위해 “평화적 정권 이양”이라는 해괴한 조어를 만들어 낸다. 김인규의 보도에서 당시 노태우의 대통령 후보 제청은 <우리 역사의 큰 전환점> <진정한 민주화 선진화> <헌정사의 새로운 이정표> <대통령의 외골 신앙> <소중한 정성> 등으로 묘사된다. 화가 나서 더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사람이 선거보도의 공정성에 대해서 박사 논문을 쓰고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하겠다는 게 지금 상황이다.




 

리포트:

오늘 민정당 대표위원이 중앙집행위원회의 제청으로 차기 대통령 후보 신청 등록까지 마친 것은 내년 초 평화적 정부 이양을 위한 일련의 정치일정 가운데 첫 단계 작업이 이행됐다는 점에서 분명히 우리 역사에 큰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헌정 40년에서 가장 부끄러웠고 우리 헌정사의 비원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아직까지 한 번도 이뤄보지 못한 평화적 정부 이양임에 틀림없습니다. 제1 공화국의 이승만 대통령이나 제3 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도 끝내는 1인 장기집권을 꾀하다가 물리적인 힘에 의해 헌정 중단 사태를 되풀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만큼 집권자가 스스로 권력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이같은 평화적 정부 이양을 경험하지 않는 한 우리 정치의 진정한 민주화와 선진화는 이뤄질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일부에서는 여야가 바뀌는 것 만이 평화적 정권교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국민이 선택하는 즉 선거의 결과에 따라야 하는 것이며 이보다도 우선 정부 이양이 없는 우리 정치사에 있어서는 현직 대통령 임기중에 집권여당이 차기 대통령 후보를 결정 제청한 그 자체가 우리 헌정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설정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전두환 대통령의 변함없는 단임의지와 평화적 정부 이양의 외골 신앙이 열매를 맺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정부나 여당이 모두 말 한마디 절차 하나하나에 신중을 기하면서 조심스럽게 정부 이양을 위한 과정을 진행시키고 있는 진지한 분위기 그 자체가 바로 진정한 민주정치를 해 보겠다는 소중한 정성으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권 내에서 후계 후보를 선출한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제 저녁 청와대 상춘재에서 있은 후보 결정을 위한 합의 도출 과정이나 오늘 있을 중앙 집행위원회의 제청 등은 모두가 민주정치의 새 장을 열어나가는 좋은 선례가 될 것입니다.



4> 1987년 6월10일 노태우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

6월 10일을 더 말해서 무엇하겠나. 하루 전 이한열이 최루탄에 피격돼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고문 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 개최가 열리면서 6월 민주 대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이다. 그 날........김인규의 뉴스는 이렇다.




리포트:

오늘의 민정당 정당대회는 현직 대통령 임기 중에 집권당이 차기 대통령 후보를 선출해 낸 우리 헌정사상 처음있는 정치 행사였습니다. 이 행사는 단임 의지를 거듭 천명해 온 전두환 대통령의 약속이 확인되는 정치적 절차였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평화적 정부 이양의 전통을 세우는 것이 우리나라 민주정치 발전의 결정적 전기가 될 것이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정치철학이 현실화되는 우리나라 정치 발전의 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민정당 정당대회는 단순한 정당행사가 아니라 우리 헌정사 40년에 새 장을 여는 획기적인 첫 걸음이라고 민정당은 자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정치사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평화적 정부 교체의 실현은 단순한 구호나 선동으로 이룩될 수 있는 쉬운일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순탄치많은 않은 길을 민정당은 오늘 대회를 통해 확실하게 추진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야당 측에서는 이러한 정치일정의 취소를 요구하며 강경투쟁을 계속하고 있어 내년초의 목표 시점까지는 넘어야할 난관이 많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수락 연설을 통해 대화의 필요성과 조화의 정치를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집권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노태우 대표위원이 평화적 정부 이양의 전통을 수립하기 위한 정국 안정과 정치 활성화라는 시대적 정치 과제를 원만히 풀어나갈 때 오늘 대회의 정치사적 의의와 역사적 의미는 진정한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5>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시국수습방안발표

다들 생각은 비슷한 모양이다. 다른 언론사에서 ‘김인규의 과거’를 보도한 것을 빼고도, 이동영상을 본 사람만 4만5천명이 넘는다. 기자협회 블로그에도 2천5백 명 이상이 방문했다.

이명박 정권의 탄생에 기여한 선거 특보 경력은 그저 가장 가까운 흠결에 불과했다. 공식적인 기록으로 찾을 수 있는 것만 따져도 끝이 없다. 기자 8년차 본격적으로 정치부 기자 초에 입문한 뒤 김인규는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을 미화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든다. 1,2편에서 봤듯이 민정당을 출입하면서 전두환을 미화하는 최전선에서 일하고, 6월 항쟁 이후에는 노태우로 대표되는 차기 정권 재창출에 전력한다.

-김인규에게 민정당 창당은 “구정치질서의 청산과 개혁을 위해 새시대 새정치의 기치를 내걸고 새역사 창조”하기 위한 사건이었다.
-김인규에게 전두환의 4.13 호헌선언은 “국가 100년 대계를 위해 최선의 길이라는 통치적 차원의 결단”이었다.
-김인규에게 노태우 후보 선출은 “민주정치 발전의 결정적 전기”였다.

여기서 한가지 궁금해진다. 87년 전두환은 결국 국민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전국적인 6월 항쟁의 열기를 버티지 못하고 대통령 직선제와 일부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 결정적 국면에서 김인규의 스탠스는 무엇이었을까.

오늘은 6.29선언 이후 김인규의 리포트를 감상해보면서 ‘진정한 달인의 면모’를 살펴보자.

6월24일 전두환이 사실상 대통령 직선제를 거부하면서 시위는 격화됐다. 26일 전국 150만 명이 동시 다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날 하루 전국에서 3,467명이 연행됐고, 경찰서/파출소 31개가 불에 타거나 부서졌다. 결국 전두환은 국민에게 굴복했다. 전격적인 6.29 선언이 이뤄졌다.

김인규는 당시 6월29일 9시 뉴스에서 노태우의 6.29선언을 “어려운 국면에 처한 현 시국을 타개하겠다는 그러한 결연한 의지”,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정국수습에 관한 문제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풀어나가겠다는 그러한 결심” 등으로 노태우의 개인적인 결단으로 규정한다.

이밖에 6.29 선언과 관련된 김인규의 여러 리포트가 있지만 가장 한심한 리포트 한 번 구경해 보자. 카메라샷, 선택된 어휘 등등 조선중앙TV가 위협을 받을 정도다. 아래는  7월1일 9시 뉴스이다.

 


 

리포트 :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은 오늘 오전 연희동 자택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시국수습안에 대한 특별담화를 텔레비전을 통해서 시청한 뒤 자신의 건의를 대통령이 전적으로 수용하고 뜻을 같이 해 준데 대해 무어라 감사의 마음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대통령의 담화내용은 대통령의 애국충정과 민주발전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어 감명스러웠다고 밝혔습니다. 노태우 대표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특별 담화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일일이 메모하고 담화발표가 끝나자 상기된 표정으로 취재기자와 주위 사람에게 다함께 박수를 치자면서 오랜만에 활짝 웃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노대표는 이어 지난 29일 특별선언을 한 이후 처음으로 중앙당사에 도착했는데 중앙당직자와 소속의원 사무처 직원 등 200여 명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자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함께 기쁨을 나눴습니다. 노대표는 당사 본관 1층에 있는 총무국을 빙 둘러선 당원들과 악수를 나누며 자신은 그동안 당이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이제 모두가 하나가 돼 최선을 다해 나가자고 격려한 뒤 대표위원실에서 기자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밝혔습니다.


김인규: 노태우 대표위원은 또 이제는 야당도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민이 원하는 열매를 하나하나 맺어 나가야 할 것이라면서 어느 누구의 반대도 없이 그 열매를 맺어갈 것으로 확신한다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기자가 아닌 부역자로 살아오면서 김인규가 학습한 내용은 뭘까. MB정권 창출에 공헌을 한 뒤 다시 KBS에 나타나 하려는 짓이 뭘까.
다음 편에서는 87년 대선 과정, 92년 3당 합당 과정 등에서 김인규의 활약상을 살펴보자.


주> 뉴스 원본은 KBS 기자협회 블로그 http://kbsjournalist.tistory.com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Posted by isss :
김동길이 난리치는 이유를 알고싶나요?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과 현 정국에 저렇게 난리치는 이유는 아래 사진 한장으로 설명됩니다.

"부정과 비리에 연루돼 검찰의 조사를 받던 전직 대통령이 자살한 그 순간부터 성자가 되는 그런 나라가 지구상에 어디 있냐"고  했지만, 정작 국민을 학살했던 전두환과는 조선일보 회장 팔순잔치에 나란히 케익도 자르고 건배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법과 원칙을 중시하는 도덕적인 현 대통령께서도 빠지지 않으셨습니다.(당시 당선자 신분)

한마디로 태생이 그런 사람이니 그냥 무시하는게 상책입니다.
(차라리 바지에 똥이나 쌌으면 괜히 건강 걱정이나 해줄텐데요...)


지난 1월2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방우영 회장 팔순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맨 오른쪽),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맨 왼쪽) 그리고 전두환과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ps. 그런데 조선일보 회장은 왜 아침이 두려웠을까....
Posted by isss :

아래의 것은 모두 사실로 밝혀진 것이라고 합니다. 87년 6월 항쟁으로 위기에 몰리다 대통령 선거기간 중 테러를 저지르고 투표일 전날 극적으로 압송, 사형 판결 16일만에 노태우에 의해 사면되고, DJ 대통령 당선 10일만에 국정원 직원과 결혼하고 잠적했다가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바뀌고 무슨 이유에선지 피해자 운운하며 나선 100명을 넘게 죽인 테러리스트... 그리고 그것을 감싸는 정권과 수구 신문...

김현희 미스터리들...

KAL858기 테러 사건이 있기 몇개월전 한국은 미안마에 인도적 무상 지원을 하기로 합니다.
->당시 29만원은 6.10항쟁등으로 핀치에 몰려 있는 상태였습니다.

KAL기가 1987년 11월 29일 미안마 안다만해(당시 레이더에서 잡히지 않는 지역따라 추락해도 한동안 알수없는 절묘한지역...)에서 실종 되었습니다.
몇일 뒤 김현희가 체포 되었습니다. 미스터리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KAL기가 실종된후 바다가 아닌 밀림을 수색했다.
->사실입니다. 거짓 정보를 흘린 것으로 알려진 미타니 타다시는 1988년 5월 의문사를 당합니다.

안다만해 수색을 포기한 이유는 블랙박스 탐지장비를 빌리는테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서이다
->당시 그렇게 발표했으나 거짓으로 밝혀졌습니다.

정형근이 말한 수색을 포기한 이유는 '사고지점의 수심이 2천~3천미터이고 물살이 초속 300미터로 빠른데다 상어가 득실거려 수색이 불가능했다'
->2004년 아사히TV가 사고지점을 확인한 결과 수심은 70미터이고 물살은 전혀 빠르지 않으며 상어도 없다고 보도했습니다.

김현희는 청산가리 가스를 마시고 자살을 시도했으며 몇일간 혼수상태였다
->청산가리는 경련을 일으켰다가 다시 회복되는 그런 종류의 독약이 아닙니다.
->김현희는 여성인데도 구급차내에서 의사를 때리고 차고 물어 뜯기도했다.(김현희 음독 자살 직후 구급차에 있던 의사 인터뷰)
->김현희는 모든것이 정상이었고 아픈데는 전혀 없었다(김현희 치료의사)

김현희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기전 김현희의 신원및 사건 일체를 보도한 신문이 있다?
->김현희는 12월 3일 깨어났고 4일까지는 묵비권 행사중이었는데 12월 2일 경향신문과 서울신문은 그들의 행적과 폭발물 종류들을 상세히 보도 했습니다.

김현희의 아버지는 1986년 9월 앙골라주재 북한무역대표부 수산대표
-> 국정원에서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직업이라 인정하였습니다.

공작원 선발 당시 주소는 평양시 문수구역 문수 1동 65반 무역아파트 7층 1호
->문수구역은 그녀가 공작원 선발 당시에 이미 없어진 주소입니다.

평양순안 비행장에서 8시 30분 출발, 오후 6시 모스크바에 도착, 다음날 새벽 4시 부다페스트 도착
->이런 스케쥴의 비행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본인 부녀 관광객으로 위장해 메트로폴리탄 호텔 811호에 투숙 5박 6일 체류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국정원도 공식 시인한 것

바레인에 입국했으나 일요일이라 항공권을 교환 못함
->바레인은 일요일이아닌 금요일이 휴일입니다.(일요일은 정상근무)

테러한 날 오전 9시40분 바레인행 걸프항공기로 아부다비를 출발
->이런 스케쥴의 비행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김현희의 어린시절이라 주장되었던 사진들(김현희도 자신이라 주장했던 사진)
->김현희가 아닙니다. 국정원도 공식 시인

폭발물-소형 라디오에 C4 340g, 액체폭약 700cc
->라디오에 C4340g을 넣을수 없음.(넣을수는 있으나 그럴경우 라디오가 작동 할수 없음.)

KAL테러와 관련 유엔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은 부결
->북한이 KAL기를 테러 했다는 물증이 전혀 없어 '증거 불충분'으로 '대북제재결의안'은 체택되지 않았습니다.

1999년 미국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 테러리즘 유형'보고서에서 'KAL기'사건을 북한의 사건에서 제외했다.
->네. 제외되었습니다. 하지만 몇년전 우리나라 정부의 재조사 이후 다시 포함 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종자 명단에서 아직도 정체를 알수 없는 두명이 있다?
->이종섭, 이순오 이 두사람은 주소가 없거나 엉터리 주소가 기제되어 있으며 아직도 가족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현재는 당시 동승한것으로 알려진 안기부 요원으로 추정만 되고 있습니다.)

사고나기 직전 한국 외교관 11명이 갑자기 일정을 바꿔 아부다비에서 내렸다?
->다음날 회의가 예정되어 있던 한국 외교관 11명이 아직도 밝히지 않는 이유로 갑자기 비행기를 탑승하지 않았습니다.
김현희에 대해서 사실로 들어난것은...
- 위조여권을 가지고 스위스와 유고를 여행한 뒤KAL858기를 탔다가 내렸다...뿐입니다.
당시의 책임자들입니다...
정형근 당시 대공 수사단장
(전 한나라당의원, 현 건강보험 공단이사장)
김기춘 당시 검찰 총장(한나라당 의원)
최병열 당시 공보처 장관(전 한나라당 총재)
김용갑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전 한나라당 의원)
이회창 당시 대법관(전 한나라당 의원 현 모야당 총재)

출처 : dvdpr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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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는 책을 낸 조선일보 방우영 명예회장.

한나라당 유력인사들을 비롯, 동아일보 사장,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나란히 참석해 조중동이 한나라당 기관지였음을 다시한번 친근하게 증명했습니다.

또 이 자리에는 전두환 국민학살자가 참여하여 과거 5공 정권에 충실히 협조했던 조선일보의 면모를 다시한번 보여줬습니다. 또, 동아일보 사장은 이 자리에서 아래와 같이 축사를 남겨 웃음을 자아냅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두 신문은 일제 강점기 때 민족혼 고취를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건국을 위해 모든 걸 바쳐 투쟁했고, 발전하는 대한민국의 기틀을 닦는데 노력했다. 또 6·25 남침으로 나라의 명운이 위기였을 때 구국의 깃발을 들었다.

또 두 신문은 경쟁과 협조를 하며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이번에 출판된 책을 통해 평생 권력에 맞선 한 신문인의 고뇌를 읽었다. 방 명예회장은 민족통일을 위해 큰일을 해낼 것이다"<오마이뉴스>

민족혼 고취, 구국의 깃발, 권련에 맞선, 민족통일을 위해...
모두 조선일보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군요.

영욕의 조선일보. 이 자리에서 방회장은 "그동안 권력의 바람을 막고, 언론 자유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왜곡을 서슴치 않아 조선일보의 평소 편집 방향과 일치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는 방 명예회장. 밤의 대통령으로 불렸기에 아침이 오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입니다.

권력은 유한하지만, 언론은 영원하군요.

조선일보여, 제발 제대로된 언론으로 환골탈태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22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출판기념회에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방 회장 부인 이선영씨, 방우영 명예회장,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박수를 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22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출판기념회를 찾아 방 회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22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출판기념회를 찾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방 회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출판기념회를 찾은 뒤 방우영 회장의 배웅을 받고 있다. 22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 출판기념회에서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김동길 교수, 전두환 전 대통령,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 부인 이선영씨,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김재순 전 국회의장,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 떡을 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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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모가 홈페이지를 오픈했습니다.
그동안 다음 까페 수준에 머물렀는데, 공식 홈페이지까지 열었군요.
http://www.jeonsamo.net/

뭐가 두려운지 철저한 회원제로 글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어떤지 보겠다고 회원 가입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각하의 나라사랑과 살신성인의 정신"이라...
살신성인이 아니라 "국민살인"의 정신이겠죠.
이런 것까지 신경쓰기는 혈압만 오르니 신경꺼야할까요?
참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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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일해공원이 생기고 말았군요.
정식 입간판도 생겼습니다.
YTN 뉴스에서 사진가져왔습니다.

명명식을 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못하고 새천년 생명의 숲 명칭을 일해공원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이 시대의 학살자를 기념하는 합천군의 개념없음에 뭐라 할 말이 없습니다.
한나라당 소속인 합천군수 심의조 군수에 대해, 한나라당은 조용히 넘어가겠다는 것인가요?

결국 어물쩡 넘어가면서 5공에 기대겠다는 것인지, 한나라당 중앙의 대응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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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1 - 김남주

2007. 5. 18. 12:43 from 카테고리 없음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붉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떨지 않는 집이 없었다
 밤 12시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버렸고
 밤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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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그때 사형시켰어야 했다

그래야만 했다...

가해자는 죽지않고 살아서 떵떵거리고,

피해자는 아직도 울분을 토하고 있는 현실...

김대중은 전두환을 사형시켰어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도 지금도 저러고 사는 놈을...

김일성이 처 죽일 놈이라고?

전두환도 똑같은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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