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기념사업 비용 1800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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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등은 좌익 계열 정당인 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적인 지하조직으로 국가를 변란하려던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 일당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나머지 16명을 전국에 수배중에 있다."고 발표한다. 
김형욱이 발표한 1차사건의 개요를 살펴보면 '1962년 1월 북괴로부터 특수사명을 띠고 남하한 간첩 김영춘의 사회로,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이었던 우동읍과 동 간사장 김배영, 김영광,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장이던 김금수, 동 경북도 간사장 도예종, 사회대중당 간사였던 허표, 전 진보당원 김한득, 빨치산 출신의 박현채 등이 참가하여 창당 발기인 대회를 갖고, 외국군 철수와 남북서신, 문화경제교류를 통한 평화통일을 골자로 한 강령과 규약을 채택하여 발족한다. 이후 조직을 확대해오다 1964년 4월 북한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중앙상임위원 도예종, 정도영, 박현채 등이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유발토록 획책하며 동시에 학생데모를 4월 혁명같이 발전케 하여 현 정권을 타도할 것을 결의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 사건으로 8년간 옥고를 치른 정만진씨 등은 인혁당은 실체가 없으며 피고인들의 법정진술까지 변조할 만큼 철저히 조작된 사건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1차 인혁당 사건은 그해 8월 18일 서울지검에 송치되었는데 중정의 발표와 달리 송치받은 검찰은 18일간의 철야수사에도 기소할 만한 혐의점을 찾지 못한다. 또한 사건 관련자들이 중정의 조사과정에서 심한 고문을 당한 것을 밝혀낸다. 결국 사건담당 검사 중 최대현 검사를 제외한 부장검사 이용훈, 김병금, 장원찬 검사는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으며 공소를 유지할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기소 거부와 함께 사표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되자 검찰과 중정은 궁지에 몰리게 되고 김형욱은 숙직담당 검사에게 압력을 넣어 서명토록 해 간신히 기소하게 된다. 사건은 국회로 비화되고 관련자들의 전기고문, 물고문 사실들이 속속 밝혀지자 검찰은 서울 고검 한옥신 검사에게 재수사를 지시한다. 그 결과 당초 국보법 위반혐의로 구속, 기소된 26명 중 학생 등 14명에 대한 공소 취하했고, 도예종 등 나머지 12명의 피고에 대해서도 국보법 위반을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등의 반공법 위반혐의로 공소장을 변경했고 법원은 이들에게 최고 3년에서 1년까지 가벼운 형량을 선고한다.

1972년, '10월 유신'으로 시작된 소위 유신정국이 가속되는 가운데 1974년 4월 3일 학생들의 대규모 반유신 저항운동을 분쇄하고자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다. 그리고 4월 25일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를 통해 학생데모의 배후에는 공산당의 조종이 있었다는 민청학련 사건을 발표한다.(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한국현대사 박사 1호' 권위자인 서중석 교수가 이 사건 겪었던 분이십니다.)
 
발표요지에 따르면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위조직과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74년 4월 3일을 기해 현정부를 전복하려 획책했다는 것이다.

법무장관 황산덕을 통해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한 것은 인혁당이라고 새로운 주장을 발표했다. 정부의 이와 같은 발표와 더불어 이전 인혁당 연루자들은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의 검찰부에 의해 국보법,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기소된다. 6월 15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를 거쳐 대법원 확정까지 10개월이 걸렸다. 3심을 거치는 동안 피고인들의 형량은 변함이 없었고 특히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형이었다.

 
이들 인혁당 연루자들은 수사기관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으며 이 사실을 폭로한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강제 추방당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 피고인 36명에 대해 원심대로 형을 선고한다. 그리고 선고 바로 다음 날 이례적으로 도예종, 사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이루어졌다. 박정권은 이들이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워 유족의 동의 없이 멋대로 화장시켜 버렸다.
 
이들에 대한 고문과 전격 처형, 시체 화장 등의 잔혹성과 의혹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기독교 인권위원회에서 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사법 살인이라고 상당한 비난을 받았으며 스위스의 국제법학자협회는 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 역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엠네스티에서도 판결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전격 처형된 8명을 비롯해 이 사건으로 전창일, 김한덕, 나경일, 강창덕, 이태환, 이성재, 유진곤씨가 무기징역을 김종대, 정만진, 조만호, 이재형씨가 징역 20년을 이창복, 황현승, 임구호, 전재권씨가 징역 15년을 장석구씨 등이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이들 중 장석구씨가 1975년 10월 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유기수 석방, 8월 15일 무기수 20년으로 감형, 12월 24일 형집행 정치로 20년형 유기수 석방등의 조치를 통해 출소했다. 그러나 출옥 후 전재권, 유진곤 씨가 지병으로 병사했으며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 박현채 전남대 교수가 95년 사망했다. 

사건의 발단에서 진행, 결과에 이르기까지 석연치않은 일 투성이로 사실 그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려해도 득보다는 해가 많은 사건으로 도대체가 왜 이런 악수를 두었는지 이해하기 힘든 사건.

설령 이들이 실제 간첩이었다 하더라도 너무나 성급한 형 집행은 이해를 벗어난다. 스파이란 존재는 죽여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 살려서 가지고 있는 정보를 있는대로 짜내고 나중에는 인질로서 적국과 거래용으로 이용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정보전의 정석이다. 당시 중정이 발표한 대로 그들이 고위 간첩이라면 당장 죽여야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공안정국을 만들려 했다고 봐도 달리 같은 해 일어난 장준하 의문사 사건과 함께 국내 여론의 반발만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또한 72년 7.4 남북공동성명으로 기대에 한껏 부풀었던 실향민들의 가슴에는 또다시 대못을 박는 짓에 불과했다.
 
후폭풍도 상당했다. 이 사건에 대한 해외의 비난 여론은 상당 기간 외교적인 짐으로 작용했다. 미국의 보수파 언론조차도 이 사건의 부당성을 강도높게 비난했을 정도인데 특히 다음해 미국의 지미 카터 정권이 도덕/인권 정치를 외치며 들어 섰을때 한미관계도 급격하게 냉각되게 만드는 간접적인 원인으로 열거될 정도이다
 
오늘날, 참여정부때와서 인혁당 사건은 조작되었음이 밝혀지고 무죄선고가 내려짐으로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당한 이들이 복권되었다. 그런데, 오늘날 몇몇 언론에서는 인혁당은 실제로 존재했다(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209772&sc=naver&kind=menu_code&keys=3 )라며 얼빠진 기사를 치고 있는데, 이는 사건의 본질을 잘못 짚은거다.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인혁당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충분한 증거 없이 법원이 판결을 내리고 사형 선고를 했으며, 그 사형 집행 또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법원이 유죄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적법하게 수집된 증거능력이 있는 증거를 바탕으로 범죄가 확실히 증명되었을 때만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있으며, 사형 판결이 확정되어도 실제 사형 집행에는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 정도 간격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백번 양보해 인혁당의 존재 여부가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왜 그 당시의 검찰은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적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법원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재판을 진행하고 판결을 진행했던 것일까?
 
오늘날 인혁당 사건은 유신정권이 자행한 만행으로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재야세력, 종교세력등 조직적인 연결을 차단하고 반유신세력을 철저히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최대의 조작극이자 국가권력에 의해 무차별적인 고문이 가해진 인권 탄압 사건으로 기록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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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되고 그간의 행적이 발표됐군요.

3번이나 만주군에 지원하여, 지인까지 동원하여 합격하고  조선인은 1년에 1명꼴 밖에 안되는 일본 육사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주군 단장 부관실의 ‘을종부관’, 현재의 작전장교에 해당하는 중요 보직을 맡아서 항일군 및 소련과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이정도면 친일로 문제없겠네요. 국내에서 순사생활한 것도 아니고...당시 일본군 소위라면 판사와 동급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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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혈서지원한 사실을 전한 만주신문 기사입니다.

1939년 3월31일치 <만주신문> 7면 기사 전문

혈서(血書)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訓導)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訓導)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 그리고 ‘한목숨 다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쓴 종이와 함께 동봉된 등기로 도착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동봉된 편지에는

(전략) 일계(日系) 군관모집요강을 받들어 읽은 소생은 모든 조건에 부적합한 것 같습니다. 심히 분수에 넘치고 송구스러운줄 아오나 무리가 있더라도 반드시 국군(만주국군-편집자 주)에 채용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중략)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할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이 다하도록 충성을 다 바칠 각오입니다. (중략) 한 사람의 만주국 군인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 : 편집자 주)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도 바라지 않고.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후략)

라고 펜으로 쓴 달필로 보이는 동군(同君)의 군관지원 편지는 이것으로 두 번째이지만 군관이 되기에는 군적에 있는 자로 한정되어 있고, 군관학교에 들어가고자 해도 자격 연령이 16살 이상 19살까지이기 때문에 23살로는 나이가 너무 많아 동군(同君)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정중히 사절하게 되었다. (『滿洲新聞』1939.3.31.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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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前대통령 말년 개헌 뒤 하야하려 했다

빅뱅이 부릅니다 - "거짓말"

참  이런 사실 아시나요

일본 총독 측근에 따르면 일본은 1946년에 우리나라 독립시켜주려고 했다고 하네요.
김일성 비서에 따르면 김일성은 통일 시킨 후 자유민주국가 세우려고 했답니다.
전두환 측근에 따르면 전두환은 광주시민에 석고대죄하려고 했답니다.
이명박 측근에 따르면 원래 이명박은 미국산 쇠고기 육사시미로 먹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전 지난주에 로또 1등했으면 전액 기부하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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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알지 못했던 다소 충격적이기까지 한 통계네요. 무역수지 통계입니다.

한나라당이 말한 경제를 망친 "잃어버린 10년"동안 우리나라 무역 흑자는 최고였네요.
박정희때도 계속 적자였고, 80년대 후반 3고 호황때만 4년간 흑자. 그리고,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10년간 흑자였습니다.

1961년부터 1997년까지 누적 적자만 700억 달러 적자. 김대중 정권에서 940억 달러 흑자로 모두 만회하고 노무현 정권때도 980억 달러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08년 들어 경제 대통령은 다시 적자로 돌아섰습니다.

참고 포스트 : 년도별 무역수지와, 국민소득의 변화. (1962~노무현정권까지.)

http://minwon.mocie.go.kr/user.tdf?a=common.HtmlApp&c=1001&page=child/trade/trad_scale_pop01.vm

년도

대통령

무역수지 (달러)

1인당 국민소득(달러)

1961

박정희공화당

-28천만

 한국

대만

일본

1962

박정희공화당

-37천만

 

 

 

1963

박정희공화당

-47천만

 

 

 

1964

박정희공화당

-29천만

 

 

 

1965

박정희공화당

-29천만

 

 

 

1966

박정희공화당

-47천만

 

 

 

1967

박정희공화당

-68천만

 

 

 

1968

박정희공화당

-10

 

 

 

1969

박정희공화당

-12

210

345

1,670

1970

박정희공화당

-11

249

389

1,984

1971

박정희공화당

-13

286

443

2,189

1972

박정희공화당

-9

316

522

2,855

1973

박정희공화당

-10

394

695

3,836

1974

박정희공화당

-24

540

920

4,206

1975

박정희공화당

-22

592

964

4,475

1976

박정희공화당

-11

799

1,132

4,976

1977

박정희공화당

-76천만

1,009

1,301

6,069

1978

박정희공화당

-23

1,399

1,577

8,457

1979

박정희공화당

-53

1,636

1,920

8,736

 

-250억 달러 적자

 

 

 

1980

전두환 정부

-48

1,598

2,344

9,257

1981

전두환 정부

-49

1,749

2,669

10,050

1982

전두환 정부

-24

1,847

2,653

9,295

1983

전두환 정부

-18

2,020

2,823

10,132

1984

전두환 정부

-14

2,190

3,167

10,734

1985

전두환 정부

-85천만

2,229

3,297

11,544

1986

전두환 정부

31

2,550

3,993

16,907

1987

전두환 정부

63

3,201

5,298

20,414

 

-59억 달러 적자

 

 

 

1988

노태우 정부

89

4,268

6,379

24,517

1989

노태우 정부

9

5,185

7,626

24,325

1990

노태우 정부

-48

5,886

8,111

25,090

1991

노태우 정부

-97

6,810

8,982

28,424

1992

노태우 정부

-51

7,183

10,506

30,926

 

-98억 달러 적자

 

 

 

1993

김영삼 정부

-16

7,811

10,964

35,488

1994

김영삼 정부

-63

8,998

11,806

38,843

1995

김영삼 정부

-100

10,823

12,686

42,667

1996

김영삼 정부

-210

11,385

13,260

37,807

1997

김영삼 정부

-85

10,315

13,592

34,730

 

-374억 달러 적자

 

 

 

1998

김대중 정부

390

6,744

12,360

31,841

1999

김대중 정부

239

8,595

13,235

35,921

2000

김대중 정부

118

9,770

14,188

38,019

2001

김대중 정부

93

9,000

12,876

33,389

2002

김대중 정부

103

10,013

12,900

31,868

 

943억 달러 흑자

 

 

 

2003

노무현 정부

150

12,720

12,700

34,169

2004

노무현 정부

294

14,162

14,560

37,173

2005

노무현 정부

232

16,291

15,482

34,188

2006

노무현 정부

158

18,351

15,471

34,954

2007

노무현 정부

146

20,946

16,160

36,021

 

980억 달러 흑자

 

 

 

2008

이명박 정부

-105

7월말기준

 

 

        언론소비자 주권 국민캠페인 펌 (http://cafe.daum.net/stopcj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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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영, 강부자 라인업을 만들었으면서, 어색하게 서민적이고 격의없는 모습을 강조하려는 것인지, 이상하게 아래와 같은 사진들이 자주 보입니다.

사진들에는 대통령에 대한 신비감에 대한 재미있는 접근으로도 볼 수도 있겠지만, 친근하고 서민적인 대통령 이미지를 만들면서 "재벌 프렌들리"와 " 프레스 프렌들리"를 하고 서민들의 삶을 점점 팍팍하게 만들 것 같은 모습을 감추려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앞에서는 서민적인 모습을 강조하면서 밤에는 연예인 불러다 술판을 벌이던 모 대통령처럼 말입니다.

쑈는 그만두고 제대로된 정책 좀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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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박정희 시절 기업하기 좋았을 것이다...

예전 모 기업인이 이런말을 한적이 있었다고 한다...
기술 개발, 원가 절감 할 필요 없다..
공무원에 뇌물주고 수주하면, 그것이 훨씬 이익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은 은행에서 대출도 쉽게 해주고,
기업 비리도 눈감아주고,
물론 정권에 밉보이면 안되지만, 최소한 정권에 아부만 잘 하면 되고...
노동운동 알아서 밟아주고...
임금 인상 억제해주고 작업 환경 개선도 필요없이...
하루 18시간씩 일시키니...
얼마나 좋았을까...
계속 적자나도...정권에 잘 보이면...망할 일도 없고...
수주하기도 쉬웠을 것...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부 규제를 글로벌하게 해야된다고 주장하지만...
그와함께 선행될 것 중에 하나가...
기업 경영 환경을 글로벌하게 해야 할 것이다...
IMF이후로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분식회계,부정회계, 계열사 부당지원, 뇌물, 상속 등등
글로벌 기준으로 개선해야 할 것들은 많다...
일단 자기반성부터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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